본문 바로가기
WRITE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라 하라. - 사도

by noolook 2023. 1. 14.
반응형

조선 후기에 있었던 사도세자 사건

영조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효장세자이고 둘째가 사도세자다. 원래 세자 자리는 장헌세자였는데 1762년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그리고 세손 정조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훗날 조선 후기 중흥기를 이끈 성군이 된다. 아무튼 사도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학문뿐 아니라 무예 및 예술 방면에도 재능이 뛰어나 장차 훌륭한 군주가 될 재목으로 여겨졌다. 하나 성장할수록 점점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온갖 기행을 일삼았고 심지어 궁녀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보다 못한 영조는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직접 손자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하들 몰래 뒤주를 가져오게 했고 그곳에 가둔 채 굶겨 죽였다. 이때 나이가 겨우 21살이었다. 뒤늦게 후회한 영조는 죽은 지 8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내렸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는 사도세자라는 이름이다.

총명하고 영특했던 아들, 아버지에게 버림 당하다.

영조 38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임오화변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사도는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1762년 윤 5월 13일, 세자 이선은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9일 만에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8일 후에야 뒤늦게 발견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 밤 궁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왕과 세자 사이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영화 초반부에선 어린 세손 이산이 등장한다. 총명하고 영특하지만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무예 연마에 힘쓰는 자유분방한 아이다. 훗날 정조가 되는 그는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편애한다고 말할 정도니 얼마나 예뻐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돌변한다. 학문 대신 칼 쓰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하고 무술 연습에 매진하는가 하면 기생집 출입까지 서슴지 않는다. 보다 못한 노론 세력이 나서보지만 소용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저 사춘기 소년의 반항쯤으로 치부했을 뿐이다. 하나 그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아비이자 스승인 영조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총명함으로 칭찬받는 손자였지만 정작 아버지는 늘 못마땅해했다. 급기야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부자간의 골을 깊어지게 만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혜경궁 홍 씨 마저 남편을 외면하자 점점 엇나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참다못한 영조는 분노를 폭발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비극의 시작은 아버지의 욕심이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그린 영화 사도는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누적 관객수 500만 명을 돌파하며 천만영화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도 뒤늦게나마 관람했는데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미워해야 했던 영조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영조는 유독 남다른 부성애를 가진 왕이었다.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만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을 터. 따라서 세자만큼은 제대로 교육시켜 훌륭한 성군으로 키우고 싶었다. 하나 세자는 어릴 적부터 영특했으나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와 칼싸움 놀이를 좋아했다. 또 툭하면 대궐 밖으로 나가 사냥을 즐겼다. 당연히 영조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노론 대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때 영조가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반응형

댓글